십전대보탕은 정말 팔진탕에서 나왔는가 | 고금의고

방고 方攷 · 고금의고 006

십전대보탕은 정말 팔진탕에서 나왔는가

사물탕·사군자탕·팔진탕·십전대보탕의 계보를 다시 읽다

빈 종이의 여백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앉은 사람과 접힌 천을 먹색과 황토색으로 그린 판화풍 표지화
한 처방의 계보는 약재가 더해진 순서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후대의 해석은 오래된 처방을 다시 분해하고 묶어 새로운 계보를 만든다.
요지

사군자탕·사물탕·팔진탕·십전대보탕의 관계를 단순한 4+4+2의 창제 순서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사물탕은 당대 외상 어혈방에서 출발해 혈을 대표하는 기본방으로 의미가 이동했고, 사군자탕도 송대 전승 속 구체적 허약 처방에서 기허의 대표방으로 추상화되었다. 금원 이후 두 처방을 기와 혈의 모듈로 결합해 팔진을 설명하는 언어가 뚜렷해졌고, 이미 전승되던 십전대보탕 역시 이 틀 안에서 다시 분해·재해석되었다. 따라서 후대의 ‘사군+사물=팔진, +황기·육계=십전’은 유용한 구조 설명이지만 실제 역사적 발생 순서와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처방의 계보는 흔히 산수처럼 설명된다. 사군자탕 네 약에 사물탕 네 약을 더하면 팔진탕이 되고, 여기에 황기와 육계를 더하면 십전대보탕이 된다. 4+4=8, 8+2=10. 방제학에서 가장 기억하기 쉬운 구조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이것을 실제 역사적 창제 순서라고 생각하고 문헌을 거꾸로 올라가면 곧 문제가 생긴다. 사물탕은 처음부터 ‘보혈의 기본방’으로 등장하지 않고, 사군자탕도 하나의 순간에 완성된 기허의 표준방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현전 《화제국방》의 십전대보탕과 금원대 팔진탕 논의를 함께 놓으면, ‘팔진탕을 먼저 만든 뒤 황기와 육계를 더해 십전대보탕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쉽게 성립하지 않는다.

이 어긋남은 어느 처방이 몇 년 먼저인가를 가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후대 의가들이 오래 전승되던 처방을 어떤 단위로 잘라 보고, 다시 어떤 이론으로 묶어 이해했는지를 보여준다. 사군자탕과 사물탕은 단순히 오래된 두 처방이 아니라, 어느 시점부터 각각 ‘기’와 ‘혈’을 대표하는 기본방으로 추상화되었다. 팔진과 십전의 계보는 그 추상화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물탕은 보혈방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현존 문헌에서 사물탕의 이른 모습을 확인하면 가장 먼저 익숙한 설명이 깨진다. 당대 골상과 문헌으로 전하는 《선수이상속단비방》에는 사물탕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1

凡傷重腸內有瘀血者用此。

심한 손상 뒤 장내에 어혈이 있는 경우 사용한다는 문장이다. 이어지는 구성은 백작약·천당귀·숙지황·천궁이다. 오늘 우리가 사물탕이라고 부르는 네 약과 같다.

같은 책의 앞쪽에서는 타박상 뒤 뱃속의 污血에 ‘사물탕과 같은 산혈약’을 먼저 쓰라고도 한다. 이 단계의 사물탕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라야 하는 단어는 혈허보다 외상과 어혈이다. 2022년 사물탕의 원류를 검토한 문헌사 연구도 이 기록을 사물탕이 정식 성방으로 확인되는 이른 사례로 보고, 당대에는 외상 어혈에 쓰이다가 송대 이후 부인과와 혈증으로 적용 범위가 이동했다고 정리한다.2

따라서 사물탕의 역사를 ‘혈허라는 병리가 먼저 있었고 그에 맞추어 네 약을 조합했다’고 쓸 수는 없다. 적어도 현존 기록은 반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먼저 혈과 관련된 구체적 임상 장면에서 네 약의 조합이 사용되었고, 그 조합이 긴 전승을 거치면서 점차 혈을 대표하는 기본방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송대 《화제국방》과 《부인대전양방》에 들어가면 사물탕의 무대는 크게 넓어진다. 월경과 충임, 산전산후의 여러 문제 속에서 調益榮衛, 滋養氣血 같은 언어가 붙고, 금원대에는 유완소·이고·주단계·왕호고 등의 저술에서 수많은 가감과 합방이 나타난다.2 사물탕이 단지 네 약의 고정 처방이 아니라, ‘혈에 관계된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조정 단위’로 이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변화는 왕호고의 《의루원융》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보인다. 그는 산후와 여러 증에서 사물탕을 계지·마황·백호·시호·이중·사역·승기 같은 전혀 다른 처방들과 절반씩 합쳐 쓸 수 있다고 적는다.6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기본 모듈을 다른 치료 방향과 결합하는 방식이다. 사물탕이 이런 식으로 사용되려면 이미 ‘이 네 약이 혈이라는 축을 대표한다’는 추상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명대 오곤의 《의방고》에 오면 이 변화가 말로 정리된다. 사물탕의 주치문은 血不足者,此方調之이다. 흥미로운 것은 ‘혈을 채운다’고 단순하게 쓰지 않고 調之, 조절한다고 표현한 점이다. 오곤은 이어 초목이 어떻게 곧바로 혈을 만들어내겠느냐고 묻고, 당귀·작약·지황이 오장의 음을 기르고 천궁이 영중의 기를 조절하여 오장이 화하면 혈이 스스로 생긴다고 설명한다.10

사물탕이 ‘보혈방’이라는 후대의 정체성을 얻었다고 해서, 그 역사가 처음부터 한 방향이었던 것은 아니다. 외상 뒤 어혈을 다루던 네 약이 부인과의 혈증을 거쳐 혈부족을 대표하는 기본방으로 다시 읽히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사군자탕도 하나의 생일을 갖지 않는다

사군자탕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누가 처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이 간단하지 않다는 점은 같다.

현전 《화제국방》은 송대 한 시점에 완성된 책이 아니다. 북송의 관방 처방집을 바탕으로 남송까지 여러 차례 교정과 증보가 이어졌고, 오늘의 통행본에는 紹興續添方, 寶慶新增方, 淳祐新添方, 吳直閣增諸家名方, 續添諸局經驗秘方 같은 서로 다른 층위가 함께 남아 있다.34 따라서 어떤 처방이 ‘《화제국방》에 실렸다’는 사실과 그 처방이 북송의 최초 편찬 때부터 있었다는 말은 같지 않다.

현재의 인삼·백출·복령·감초 네 약으로 된 사군자탕은 《화제국방》 계열에서 榮衛氣虛, 臟腑怯弱, 식욕부진·복창·장명·설사·구역 같은 상태를 다루는 처방으로 전승된다. 후대의 ‘기허 기본방’이라는 말보다 병자의 모습이 훨씬 구체적이다. 현대의 사군자탕 문헌고증 연구도 《화제국방》 이후 역대 방서에서 구성과 주치, 방의가 어떻게 정리되는지를 별도로 추적한다.5

더 복잡한 점도 있다. 사군자탕이라는 이름 아래 현재와 다른 약미를 가진 이방이 있고, 반대로 현재의 네 약 조합이 다른 이름으로 더 이른 문헌에 나타난다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사군자탕의 창방자’를 한 사람에게 돌리기보다는 현재의 네 약, 四君子湯이라는 이름, 그리고 氣虛의 대표방이라는 정체성이 언제 서로 결합했는가를 따로 보는 편이 안전하다.

명대에 오면 그 결합은 매우 선명해진다. 우단의 《의학정전》은 거의 교과서처럼 연속해서 적는다.9

四君子湯,治氣虛。
四物湯,治血虛。

그리고 곧바로 八物湯治氣血兩虛라 하면서 四君子合四物湯共為一劑라고 설명한다. 이때쯤이면 사군과 사물은 단순한 개별 처방을 넘어 각각 氣와 血이라는 두 치료 축을 대표하는 언어가 되어 있다.

오곤의 《의방고》도 비슷하다. 얼굴빛이 위백하고, 말소리가 약하고, 사지에 힘이 없고, 맥이 허약한 모습을 사 진으로 확인한 뒤 如是則宜補氣라 하고 사군자탕을 둔다. 반면 팔진탕에는 血氣俱虛者,此方主之라고 적는다.10 사군자와 사물을 합치는 일은 약 여덟 가지를 한데 넣는 것보다 먼저, 두 처방을 각각 氣와 血의 대표로 읽는 이론이 있어야 자연스러워진다.

팔진탕은 누가 처음 합쳤는가

이 질문에 가장 간단한 답을 주는 문장은 왕호고의 《의루원융》에 있다.

四君子湯合四物湯為八珍湯。6

사군자탕과 사물탕을 합하면 팔진탕이 된다는 문장이 13세기 전반의 저술에 이미 보인다. 《의루원융》의 초고는 1231년에 이루어졌고, 원고가 유실된 뒤 왕호고가 다시 복원하여 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그렇다면 왕호고를 팔진탕의 창방자라고 부르면 될까.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같은 책의 상황이 너무 복잡하다. 그는 바로 주변에서 스승 장원소의 八物湯을 언급하고, 사물탕을 다른 처방과 각반으로 결합하는 여러 용법을 전한다. 왕호고가 기록한 문장이 ‘팔진이라는 이름의 최초 발명’을 뜻하는지, 이미 스승 계열이나 당시 임상에서 사용되던 합방 원리를 정리한 것인지는 이 문장만으로 알 수 없다.

한 세기쯤 뒤 원대 《서죽당경험방》에는 오늘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여덟 약이 八珍散이라는 이름 아래 안정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당귀·천궁·숙지황·백작약과 인삼·감초·복령·백출을 각각 한 량씩 쓰며, 주치는 調暢榮衛,滋養氣血,能補虛損이라 적는다.8 청대 사고관신의 제요는 이 팔진산을 아예 사군자탕과 사물탕의 並方, 즉 두 처방을 함께 쓴 방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초의 이름 하나를 찾는 것보다 13세기 전후에 처방을 ‘기본방의 결합’으로 읽는 문법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금원 의학은 약 하나의 효능만이 아니라 기존 처방 전체를 하나의 기능 단위로 취급하고, 그 단위를 다른 처방과 결합해 새로운 병태를 설명하는 데 익숙해졌다. 팔진탕은 이 모듈식 사고가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십전대보탕은 이 계보보다 얌전히 뒤에 서지 않는다

교과서적 설명대로라면 이제 팔진탕이 완성되었으니 황기와 육계를 더해 십전대보탕이 나와야 한다. 실제 후대 방론은 그렇게 말한다. 문제는 현존 문헌의 시간 층위가 그렇게 단정한 직선을 그려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현전 《화제국방》의 吳直閣增諸家名方에는 이미 십전대보탕이라는 이름과 열 가지 약이 나온다. 주치는 오로칠상·식욕저하·구병허손·조열·몽정·슬약뿐 아니라 一切病後氣不如舊, 병을 앓은 뒤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은 상태까지 매우 넓다. 처방 설명에는 性溫不熱,平補有效라는 문구도 붙는다.3

여기서 곧장 ‘십전대보탕이 팔진탕보다 먼저 발명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 《화제국방》 자체가 여러 시대의 증보층을 품은 책이고, 현재 보이는 편목의 배치만으로 실제 창방 연대를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군자·사물·팔진 계열의 유실된 전승이 더 이르렀을 가능성도 남는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말할 수 있다. 현존 기록만으로는 ‘사군과 사물이 먼저 기본방이 되고, 어느 의사가 둘을 합쳐 팔진을 만든 뒤, 다시 두 약을 더해 십전을 창제했다’는 직선적 발생사를 입증할 수 없다. 후대의 4+4+2 도식은 구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훌륭하지만, 그 자체가 곧 연대기의 순서를 보증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왕호고의 십전산 설명에서 더 분명해진다. 《의루원융》은 십전의 열 약을 두 묶음으로 잘라 읽는다.

參術茯苓甘草,四君子湯也。
川芎芍藥當歸地黃,四物湯也。7

그리고 血氣俱衰,陰陽並弱하기 때문에 십전이라 이름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왕호고가 하고 있는 일은 열 약의 창제 과정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눈앞에 있는 십전산을 사군과 사물이라는 두 개의 기본 구조로 분해하여 해석하는 일이다.

이 대목을 거꾸로 읽으면 방제학의 역사에 다른 모습이 보인다. 복잡한 처방이 언제나 단순한 기본방에 약을 하나씩 더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 수 있다. 먼저 경험적으로 전승되던 큰 처방이 있었고, 후대 의가가 그 안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작은 처방의 구조를 찾아내어 다시 설명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왕호고 개인에게만 보이는 습관도 아니다. 그는 오적산을 설명하면서 그 안에서 마황계지각반탕, 평위산, 궁귀탕 등 여러 처방 구조를 찾아낸다. 하나의 복방을 기존의 작은 방들로 ‘해부’하는 것이 그의 방론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7 십전대보탕 역시 같은 눈으로 읽혔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4+4+2라는 아름다운 계보가 완성되기까지

명대로 내려오면 이 복잡한 전승은 훨씬 정돈된다. 《의학정전》에서는 사군자탕은 기허, 사물탕은 혈허, 팔물탕은 기혈양허, 십전대보탕은 氣血俱虛而挾寒이라는 식으로 차례가 놓인다.9 실제 역사적 선후와는 별개로, 처방 체계 안에서는 네 방이 하나의 계단으로 배열되기 시작한다.

《의방고》에서도 사군은 보기, 사물은 혈을 조절하고 생하게 하는 방, 팔진은 혈기구허의 방으로 해석된다.10 이 단계의 방론이 중요한 까닭은 처방을 ‘어떤 병에 쓰인 옛 약’에서 ‘특정 생리 축을 대표하는 기본 공식’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사군자탕은 氣를, 사물탕은 血을 대표하고, 그러면 두 축이 함께 허할 때 두 방을 합하는 일이 이론적으로 너무나 자연스러워진다.

청대 왕앙의 《의방집해》에 오면 오늘 익숙한 도식은 거의 완성된다. 그는 사군과 사물의 합을 팔진이라 하고, 다시 황기를 더해 助陽固表, 육계를 더해 引火歸元하면 십전대보탕이 된다고 설명한다.11

이 설명은 매우 강력하다. 열 약을 외우지 않아도 4+4+2라는 구조가 기억되고, 팔진과 십전의 차이를 황기와 육계의 추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임상적 사고에도 유용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사와 해석을 구별해야 한다.

왕앙이 보여준 것은 적어도 수백 년의 전승을 거친 뒤 완성된 구조적 이해다. 그것을 송대의 실제 창방 장면으로 그대로 투사하면, 당대 외상방이었던 사물탕의 초기 모습도, 누층적으로 형성된 《화제국방》의 편찬사도, 금원 의가들이 처방을 끊임없이 합치고 다시 분해하던 과정도 사라진다.

십전대보탕의 계보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래서 ‘누가 열 번째 약을 넣었는가’가 아니다.

사물탕은 어느 순간 혈을 대표하게 되었고, 사군자탕은 기를 대표하게 되었다. 두 처방이 그렇게 추상적인 기본 단위가 된 뒤 팔진은 氣血兩虛라는 복합 상태의 가장 아름다운 합방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승되던 십전대보탕 역시 그 체계 안에서 ‘팔진에 황기와 육계를 더한 방’이라는 새로운 위치를 얻었다.

처방은 약재의 조합으로만 전승되지 않는다. 후대가 그 처방을 어떻게 읽었는지도 함께 전승된다. 때로는 그 해석이 너무 성공적이어서, 나중에는 해석의 순서를 실제 창제의 순서로 기억하게 된다.

따라서 ‘십전대보탕은 팔진탕에서 나왔는가’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 답이 필요하다. 구성과 방론의 언어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사군과 사물을 합한 팔진에 황기와 육계를 더한 구조는 명청대 방론에서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의사학적 발생 순서까지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유보해야 한다.

현존 문헌이 보여주는 것은 더 복잡하다. 사물이라는 오래된 혈의 처방, 송대 관방서 안에서 성장한 사군과 십전의 전승, 금원대의 합방과 기본방 모듈화, 원대 팔진산의 안정된 구성, 그리고 명청대에 완성되는 기·혈의 방론이 서로 겹쳐 오늘 우리가 아는 계보를 만들었다.

그 점에서 4+4+2는 틀린 설명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처방이 태어난 순간을 찍은 족보라기보다, 후대 한의학이 여러 시대의 처방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가장 성공적인 지도에 가깝다.

자료와 근거

참고 문헌 11편

참고 문헌

  1. 고전 원문 《仙授理傷續斷秘方》 四物湯

    「凡傷重腸內有瘀血者用此」와 백작약·당귀·숙지황·천궁 4미 구성. 현존 전사본에서 사물탕이 외상 뒤 어혈을 다루는 맥락에 놓인 대목.

  2. 현대 의사학 연구 四物汤源流钩沉

    黄天骄, 王育林. 四物汤源流钩沉. 中医学报. 2022;37(2):231-235. DOI:10.16368/j.issn.1674-8999.2022.02.042. 사물탕의 당대 외상방 기록, 송대 부인과 적용, 금원 이후 혈증 대표방으로의 전개를 검토한다.

  3. 고전 원문·편찬사 《太平惠民和劑局方》

    현전 통행본의 십전대보탕은 「吳直閣增諸家名方」 층에 수록되며 ‘一切病後氣不如舊’ 등 넓은 허손 주치와 10미 구성을 전한다. 이 책은 송대에 여러 차례 증보된 누층적 방서이므로 각 처방의 수록 층위를 구별해야 한다.

  4. 고서 서지 자료 故宮博物院 《增廣太平惠民和劑局方》 해제

    《화제국방》이 송대 관방서로 편찬된 뒤 반복적으로 교정·증보되어 현전 통행본이 형성되었음을 설명하는 서지 자료. 처방의 ‘최초 수록’을 책 전체의 최초 편찬 연대와 동일시하지 않기 위한 참고다.

  5. 현대 의사학 연구 经典名方四君子汤的历史沿革与关键信息考证

    何牟, 李静, 杨骏, 等. 上海中医药杂志. 2023;57(4):83-90. DOI:10.16305/j.1007-1334.2023.2209019. 사군자탕의 처방 원류와 역대 구성·방의·주치 변화를 체계적으로 검토한 문헌고증 연구.

  6. 금원 방론 원문 王好古, 《醫壘元戎》 卷十一

    「四君子湯合四物湯為八珍湯」을 명시하고, 사물탕을 여러 상한 처방과 각반탕으로 운용한 기록을 함께 싣는다. 현재 전승본의 기본방 모듈화 양상을 보는 핵심 대목.

  7. 금원 방론 원문 王好古, 《醫壘元戎》 卷二

    십전산의 10미를 사군자탕과 사물탕의 두 구성으로 나누고 「血氣俱衰,陰陽並弱」으로 해석하는 대목. 《醫壘元戎》 초고는 1231년에 이루어졌고 현전본은 이후 복원·재편된 전승을 따른다.

  8. 원대 방서 원문 沙圖穆蘇, 《瑞竹堂經驗方》 卷四 — 八珍散

    당귀·천궁·숙지황·백작약·인삼·감초·복령·백출의 8미를 각 1량으로 두고 「調暢榮衛,滋養氣血,能補虛損」이라 한 기록. 현재 익숙한 팔진 8미 조합의 안정된 전승을 확인할 수 있다.

  9. 명대 방론 원문 虞摶, 《醫學正傳》

    「四君子湯治氣虛」「四物湯治血虛」「八物湯治氣血兩虛」「四君子合四物湯共為一劑」를 연속하여 제시하고 십전대보탕을 기혈구허겸한의 처방으로 정리한다.

  10. 명대 방론 원문 吳昆, 《醫方考》

    사군자탕을 기허의 대표방으로, 사물탕을 혈부족을 조절하는 처방으로, 팔진탕을 혈기구허의 처방으로 설명한다. 처방의 경험적 전승이 기·혈이라는 이론적 축으로 추상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11. 청대 방론 원문 汪昂, 《醫方集解》

    사군과 사물의 합을 팔진으로 설명하고, 다시 황기를 더해 조양고표하고 육계를 더해 인화귀원하여 십전대보탕이 된다고 정리한다. 오늘날 익숙한 4+4+2 구조가 가장 선명하게 표현된 후대 방론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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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탕·사물탕·팔진탕·십전대보탕의 관계를 단순한 4+4+2의 창제 순서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사물탕은 당대 외상 어혈방에서 출발해 혈을 대표하는 기본방으로 의미가 이동했고, 사군자탕도 송대 전승 속 구체적 허약 처방에서 기허의 대표방으로 추상화되었다. 금원 이후 두 처방을 기와 혈의 모듈로 결합해 팔진을 설명하는 언어가 뚜렷해졌고, 이미 전승되던 십전대보탕 역시 이 틀 안에서 다시 분해·재해석되었다. 따라서 후대의 ‘사군+사물=팔진, +황기·육계=십전’은 유용한 구조 설명이지만 실제 역사적 발생 순서와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핵심 내용

  • 현존 문헌상 사물탕의 이른 정식 기록은 외상 뒤 장내 어혈을 다루는 처방이며, 후대에 혈증·혈허의 대표방으로 의미가 이동했다.
  • 왕호고의 《의루원융》에는 13세기 전반 이미 ‘사군자탕과 사물탕을 합하여 팔진탕이 된다’는 문장이 보이지만, 이것을 왕호고 개인의 최초 창방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 현전 《화제국방》과 금원·명청 방론을 함께 보면 십전대보탕을 팔진탕 이후에 단순 가미하여 창제한 처방으로만 설명하기 어렵고, 4+4+2 도식은 후대에 정교해진 구조적 해석으로 보는 편이 문헌에 더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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