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 文攷 · 고금의고 005
허로는 어떤 몸을 남겨 놓았는가
소모가 지나간 뒤에도 돌아오지 못한 몸에 대하여
《금궤요략》의 허로는 단순한 결핍이나 쇠약 하나로 닫히지 않는다. 허번불면·이급·심계·번열·건혈처럼 서로 다른 형상을 한 편 안에 두며, 이는 허로를 ‘무엇이 부족한가’뿐 아니라 ‘무엇을 오래 견뎠고 소모 뒤 무엇이 돌아오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읽게 한다. 다만 이를 알로스테시스·번아웃·ME/CFS와 동일시할 수 없고, 하나의 회복 실패 이론으로 합치는 것 역시 현대의 해석 가설이다.
허로는 어떤 몸을 남겨 놓았는가
허로를 피로와 쇠약의 옛 이름으로 읽으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허한 사람은 기운이 없고, 오래 앓아 마르고, 부족한 것을 보해야 한다. 문제는 《금궤요략》의 허로편을 실제로 펼쳐 놓는 순간부터 생긴다.
虛勞虛煩不得眠,酸棗仁湯主之。
허로한데 잠들지 못한다.1
다른 조문은 더 복잡하다.
虛勞裡急,悸、衄,腹中痛,夢失精,四肢酸痛,手足煩熱,咽乾口燥,小建中湯主之。
속이 당기고 배가 아프며 가슴이 뛰고 코피가 난다. 사지는 시큰거리는데 손발에는 번열이 있고 입과 목은 마른다.2 쇠약해서 축 처진 몸이라는 첫 인상과는 상당히 다르다. 기력이 떨어진 것과 긴장이 남아 있는 것, 마른 것과 달아오르는 것이 한 사람에게 겹쳐 있다.
허로편의 끝으로 가면 더 이상해진다. 五勞虛極羸瘦, 오랜 손상으로 극도로 허해져 수척한 사람을 말하면서 곧바로 內有乾血이라 한다. 피부는 갑착하고 두 눈은 검어진다. 그리고 緩中補虛라 적은 뒤 대황·자충·수질·맹충이 들어가는 대황자충환을 붙여놓았다.3
허가 단순히 부족한 양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세 조문은 한데 놓기가 쉽지 않다. 하나는 잠들지 못하고, 하나는 안이 급하고 달아오르며, 하나는 오래된 무언가가 몸 안에 남아 있다.
후대 의학은 이 복잡함을 기허·혈허·음허·양허의 부족으로 세분하여 설명해 왔다. 이 체계는 실제 임상에서 유용하다. 손발의 번열과 구건을 음혈의 부족으로, 요통과 소변 문제를 신허로, 식욕과 피로를 비기허로 나누어 읽으면 《금궤요략》의 서로 다른 허로 조문도 어느 정도 정리된다. 그러나 정리가 잘 된다는 것과 그것이 처음부터 허로라는 말의 뜻이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허로편에는 후대의 부족 분류를 거꾸로 흔드는 장면들이 남아 있다. 부족한데 왜 번하는가. 허한데 왜 급한가. 극도로 수척한데 왜 안에는 건혈이 남아 있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려면 虛보다 勞를 먼저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소문》 〈선명오기론〉의 오로는 久視傷血,久臥傷氣,久坐傷肉,久立傷骨,久行傷筋이라 했다.4 눈을 쓰고, 눕고, 앉고, 서고, 걷는 것은 어느 하나 특별한 병적 행위가 아니다. 문제를 만드는 글자는 앞에 붙은 久다. 어떤 기능과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
이것을 오늘의 ‘과로’ 개념으로 그대로 번역할 수는 없다. 오래 앉으면 살을 상한다는 고대의 생리론과 현대의 좌식생활 연구는 서로 다른 설명 체계다. 다만 적어도 이 조문에서 勞는 무거운 물건을 들고 육체를 혹사하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활동도 오래 한쪽으로 기울어 지속되면 몸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관찰이 들어 있다.
《금궤요략》의 대황자충환 조문도 食傷、憂傷、飲傷、房室傷、肌傷、勞傷을 한 문장에 병치한다.3 먹는 것, 근심하는 것, 술, 성생활, 몸의 손상과 노동이 허로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길로 놓여 있다. 여기에서도 육체적 노동만 따로 떼어 勞의 본질로 삼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고대의 허로를 오늘의 정신적 번아웃으로 바꾸어 읽을 수도 없다. 과거에는 감염, 영양의 불안정, 추위, 반복되는 출산과 육체적 노동처럼 직접 몸을 소모시키는 조건의 비중이 지금보다 컸을 것이다. 반대로 오늘의 도시 생활에서는 장시간의 인지 노동, 지속적인 판단과 응답, 수면 시간까지 침범하는 업무와 디지털 자극처럼 다른 형태의 부하가 커졌다. 어느 시대가 더 많이 소모되었는지를 비교하는 문제라기보다, 무엇이 소모를 만들었는가의 구성이 달라졌다고 보는 편이 낫다.
여기에서 허로를 ‘소모’라고만 번역하는 것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
운동을 해도 소모되고 일을 해도 소모된다. 그 뒤에 돌아오면 문제가 없다. 밤에 잠들고, 먹은 것이 다시 몸의 일부가 되고, 긴장은 풀리며, 다음 날에는 어느 정도 이전 상태를 회복한다. 소모는 생리의 일부다.
허로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오히려 소모 이후의 모습이다.
산조인탕 조문에서는 지쳤는데 수면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소건중탕 조문에서는 부족한데 이급과 심계와 번열이 남아 있다. 대황자충환 조문에서는 오랜 손상의 결과가 乾血이라는 이름으로 몸 안에 머문다. 셋은 같은 병리라고 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 질문을 공유한다.
무엇이 부족한가보다, 소모가 지나간 뒤 무엇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2012년 알로스테시스를 한의학에 소개하면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이와 비슷한 문제였다. 당시에는 항상성을 고정된 정상값으로 보기보다, 생명체가 환경 변화에 따라 여러 체계를 움직여 새로운 동적 평형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데 주목했다.5 알로스테시스는 병리 그 자체가 아니라 적응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적응 반응이 반복되고 지속되면서 그 과정의 비용이 다시 다음 적응을 방해하게 되는 경우다.
당시 수면을 따로 다루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낮 동안 외부 자극에 맞추어 계속 조절하던 몸이 밤에도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면 회복 과정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6 이 설명은 허로의 고전 병리를 밝혀주는 증거가 아니다. 《금궤요략》이 HPA axis나 allostatic load를 관찰했다는 식으로 읽는 순간 두 시대의 언어는 모두 훼손된다.
그런데 14년 뒤 虛勞虛煩不得眠이라는 짧은 문장을 다시 보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눈에 들어온다.
허로에서 불면은 단순히 피로에 덧붙은 별개의 증상이 아닐 수 있다. 피곤하면 잘 자야 할 것이라는 상식과 달리, 오랫동안 소모된 사람 가운데 일부는 오히려 잠드는 기능부터 흔들린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고, 활동이 끝났는데도 심계·번·긴장이 남는다면 피로의 크기만 재는 것으로는 그 상태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최근 중의학의 만성피로 논의에도 비슷한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장진현의 만성피로증후군 논의에서는 이를 虛勞 하나로만 두지 않고 鬱病과 겹쳐 읽는다. 설명의 출발은 기허지만, 기허가 오래되면서 기울로 이어지고 다시 화가 움직여 심신을 교란한다는 식이다. 치료 원칙 역시 理虛解鬱,降火安神으로 제시한다.7
이것은 한 의가의 이론과 임상 경험이며 만성피로증후군 전체의 병태를 설명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 더구나 ME/CFS는 단순한 정신적 과로나 번아웃과 같은 질환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논의가 흥미로운 까닭은 부족과 과잉을 반대말로 놓지 않기 때문이다. 허해지면 모든 반응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능은 떨어지는 동안 다른 반응은 오히려 정리되지 않은 채 남을 수 있다고 본다.
2026년 산조인탕의 虛勞虛煩不得眠을 다시 검토한 논문도 이 조문을 간혈부족과 허열 하나로 좁히지 않는다. 저자들은 기혈의 부족 외에 영위의 운행이 어긋나는 경우, 위기가 음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 심신이 안정되지 않는 경우를 함께 검토한다.8 이 역시 문헌론이며 현대적 기전을 입증한 연구는 아니다. 다만 현재의 중의학 내부에서도 ‘허로의 불면’을 단순한 재료 부족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은 확인된다.
여기까지 가면 ‘현대의 허로는 정신적 소진이다’라는 결론은 오히려 너무 좁아진다.
정신적 소진은 오늘의 중요한 소모 경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수술 뒤 몸이 이전과 달라진 사람, 만성 염증성 질환을 오래 앓은 사람, 약물에 의해 생리적 조절 조건이 변한 사람, 오랜 질병 뒤 식사와 수면과 활동이 함께 무너진 사람도 모두 ‘소모 뒤 돌아오지 않은 몸’이라는 질문 안에서는 비교해 볼 수 있다. 원인이 다르면 현대 의학적 진단도 달라져야 하며, 이들을 허로라는 이름으로 다시 하나의 질환으로 묶을 이유는 없다.
허로 역시 처음부터 하나의 병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금궤요략》 허로편이 서로 다른 만성 쇠약 상태를 한 편 아래 모은 것이라면, 산조인탕·소건중탕·대황자충환을 하나의 ‘회복 실패’ 이론으로 묶는 것 역시 후대의 새로운 합성일 수 있다. 이것이 이 글에서 남겨 두어야 할 첫 번째 반론이다.
두 번째 반론은 더 단순하다. 허로의 여러 역설은 굳이 새로운 틀을 만들지 않아도 후대의 음허·양허·기혈허와 겸증의 조합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임상에서는 이 방식이 더 구체적인 변증과 처방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금궤요략》의 원문으로 되돌아갈 이유가 있다.
후대의 체계는 무엇이 부족한지를 세밀하게 구별하는 데 강하다. 반면 허로편의 오래된 조문들은 부족해지기까지 무엇을 오래 겪었는지, 부족과 함께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를 한 장면 안에 보존한다. 憂傷과 勞傷의 이력이 있고, 不得眠과 裏急이 있으며, 끝에는 乾血도 있다.
그러므로 허로를 오늘 다시 읽는다면 “이 환자는 기허인가 음허인가”보다 한 단계 앞선 질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 몸은 무엇을 오래 견뎌왔는가.
그 일이 지나간 뒤 무엇은 돌아왔고 무엇은 돌아오지 않았는가.
허로라는 말이 오늘의 진단명을 대신할 수는 없다. 다만 오래 소모된 사람을 볼 때 부족한 것만 찾지 않도록 만드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몸은 비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래 앓은 뒤에도 긴장이 남고, 열이 남고,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남고, 때로는 이전 손상의 흔적이 남는다.
《금궤요략》의 허로가 남겨 놓은 것은 어쩌면 ‘허약한 사람’이라는 하나의 형상이 아니라, 소모가 끝난 뒤에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전 상태에 돌아가지 못한 몸들의 기록인지 모른다.
자료와 근거
참고 문헌 8편
참고 문헌
- 고전 원문 《金匱要略》 血痺虛勞病脈并治 — 酸棗仁湯 조문
「虛勞虛煩不得眠,酸棗仁湯主之。」 《金匱要略》 血痺虛勞病脈并治.
- 고전 원문 《金匱要略》 血痺虛勞病脈并治 — 小建中湯 조문
「虛勞裡急,悸、衄,腹中痛,夢失精,四肢酸痛,手足煩熱,咽乾口燥,小建中湯主之。」 《金匱要略》 血痺虛勞病脈并治.
- 고전 원문 《金匱要略》 血痺虛勞病脈并治 — 大黃蟅蟲丸 조문
「五勞虛極羸瘦……內有乾血,肌膚甲錯,兩目黯黑,緩中補虛,大黃蟅蟲丸主之。」 《金匱要略》 血痺虛勞病脈并治.
- 고전 원문 《黃帝內經·素問》 宣明五氣
「久視傷血,久臥傷氣,久坐傷肉,久立傷骨,久行傷筋,是謂五勞所傷。」 《黃帝內經·素問》〈宣明五氣〉.
- 필자 과거 논고 알로스테시스와 한의학
최연승. 알로스테시스와 한의학. 민족의학신문. 2012. 항상성을 고정값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동적 조절로 읽고, 지속적 스트레스 반응이 만드는 부담을 논한 연재 글.
- 필자 과거 논고 알로스테시스와 수면
최연승. 알로스테시스와 수면. 민족의학신문. 2012. 수면과 알로스테시스 부하의 관계를 다룬 연재 글.
- 현대 중의학 의론 张振贤慢性疲劳综合征伴负性情绪辨治经验
2025년 만성피로증후군과 부정적 정서의 병기를 虛勞와 鬱病의 중첩으로 읽고 「理虛解鬱,降火安神」을 제시한 임상 경험 논문. 의가 경험론으로 해석 범위를 한정한다.
- 현대 중의학 문헌론 酸枣仁汤治疗“虚劳虚烦不得眠”理论和用药经验探讨
2026년 「虛勞虛煩不得眠」과 산조인탕을 기혈부족·영위 운행·위기입음·심신 안정의 층위에서 검토한 문헌·이론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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